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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do it, 나이키 운동화

by PD 하경 2018. 2. 9.

 나이키는 필 나이트와 빌 바우어만이 세운 스포츠 용품 회사로 주력 상품은 운동화이다. 1964'블루 리본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1971'나이키'라는 상호로 바꾸었다. 2017년 현재 전 세계 스포츠 용품 시장에서 라이벌 격인 아디다스를 제치고 독보적인 스포츠 브랜드 1위 기업으로 성장하여 '애플', '구글', '인텔', '맥도날드' 등과 더불어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가 되었다..

 

 나이키는 미국 공식 홈페이지에도 온라인 스토어가 있으며, 델타 항공사의 스카이마일스 쇼핑이나 아메리칸 항공의 어드밴티지 e-쇼핑 사이트를 경유하여 마일리지를 적립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온라인 스토어가 한국 카드를 거의 안 받아 준다는 점이다. 보통 나이키 공식 홈페이지의 온라인 스토어에서 물품을 구매하려면 카드를 직접 이용하기 어려워서 페이팔을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아니면 피니시라인 같은 사이트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나이키하면 떠올리는 부메랑 형태의 스우시 로고는 1971년 포틀랜드 주립대의 그래픽 디자인 전공 대학원생 캐롤린 데이비슨이 필 나이트의 제의를 받고 단돈 35천원에 제작했다고 한다. 이 금액도 처음부터 단가가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당 2천원이여서 17시간 30분을 만들고 만든 시간에 따라 35천원을 받았다고 한다. 필 나이트는 데이비슨에게 로고를 의뢰할 때 로고가 단순하고 부드러우며 동적인 느낌을 전달해야 한다고 주문했고 또한 아디다스의 로고와는 전혀 달라야 한다고 말했다. 데이비슨이 로고를 완성하고 나이트와 경영진들에게 보여주자 나이트는 "별로지만 보면 볼수록 좋아질 것 같다." 라고 밝혔다고 한다. 로고가 발탁되고나서 데이비슨은 뭔가 아쉬운지 로고를 개선하고 싶다고 했지만 나이트는 마감 기한을 맞춰야해서 거절했다고 한다.

 

 그렇게 제작된 로고는 1971년 상호를 나이키로 바꾸면서 공개되었다. 나이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로고는 니케의 영혼과 날개를 상징한다고 한다. 1971년부터 자잘한 변화가 있어왔지만 현재는 NIKE 라는 글자가 새겨진 디자인과 부메랑형태의 로고만 있는 디자인만 사용되고있다. 데이비슨의 말에 따르면 나중에 나이트가 로고의 디자이너인 데이비슨에게 감사를 표하며 깜짝파티로 나이키 로고 모양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반지와 나이키 주식 500주를 선물했다고 한다. 보통 로고를 제작해준 중소규모 회사가 대성공을 이루고 나면 페이를 적게 받은 디자이너들이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생각하면 도의적으로 후하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 덕에 캐롤린 데이비슨은 백만장자는 아니어도 편하게 살고 있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했다. 특히 현재에 와서는 이 로고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로고가 되었으며 그 자체로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마이클 조던부터 로저 페더러,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 수많은 선수들이 나이키의 협찬을 받아 장비를 입고 홍보를 하면서 이 로고가 자연스레 노출이 많이 됐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이 운동선수와 브랜드를 연결짓는다는 심리를 이용한 마케팅 기법이다.

 

 나이키라는 회사의 역사에 대해 조금 더 깊게 들어가보겠다. 대학을 졸업한 필 나이트는 스탠포드 경영대학원에 진학하고 빌 바우어만은 여전히 코치로 남아 있었지만 미국의 운동화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독일을 견제하고 기록 향상을 위해 고성능 신발의 영향력을 각각 생각하고 있던 그들은 의기투합하여 1964년 블루 리본 스포츠라는 회사를 설립하였다아식스로부터 자신들을 무역회사로 소개하여 아식스의 신발 메이커 중 하나인 오니츠카 타이거 신발 200켤레를 들이면서 사업은 시작되었다. 변변한 상점도 하나 없어서 창고에 제품을 쌓아두고 트럭으로 여러 대학의 운동장을 돌아다니며 제품을 판매하면서 첫 해 8천 달러의 판매로 250달러의 수익밖에 올리지 못했지만 필드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우수한 운동화의 지속적인 연구는 선수들의 성적에 영향을 주었고 이듬해 30만 달러로 매출이 크게 증가하였다.

 

 1971년이 되어 블루 리본 스포츠는 더 이상 오니츠카 타이거를 유통하지 않고 자사의 신발 생산 라인을 구축하면서 나이키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 때 나이키의 스우시로고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후 나이키는 업계의 선두주자 아디다스를 추월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필 나이트의 의지를 보여주는 일화로서, 아무 생각 없이 회의에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고 등장한 직원은 양말을 신고 회의에 참석할 수 밖에 없었다든가, 사장 앞에서 경쟁사 신발을 신는 패기 백설공주의 옷을 벗기는 난쟁이가 되겠다는 필 나이트의 발언이 있다. 미국에 조깅 붐이 불었을 때, 조깅은 스포츠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신속하게 나서지 않던 아디다스와 달리 조깅화를 출시하여 미국 내 고객들의 호응을 얻었으며, 마이클 조던을 내세운 캠페인은 마침 노쇠한 아디다스의 경영자 호르스트 다슬러와 겹쳐 아디다스의 리즈시절에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반면 미국 내에 피트니스 열풍이 불었던 당시, 나이키는 조깅 열풍 당시의 아디다스처럼 아줌마들이 음악 틀어놓고 춤추는게 피트니스지. 그건 스포츠가 아님하면서 늑장대응하여 가벼운 피트니스화를 출시한 리복의 도전을 받는 듯 했으나 그래도 미국이 홈 그라운드인지라 아디다스처럼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는 않았다. 이후 1976년 브랜드 광고를 하게 되고 순식간에 성장하여 1980년에는 미국 운동화 시장의 절반을 집어삼키게 된다. 이때 쯤부터 아디다스는 전세계 시장 지분에서 나이키에게 완전히 밀렸다고 볼 수 있다. 나이키의 매출은 마이클 조던과 협업으로 제작한 에어 조던 시리즈의 성공으로 급상승하게 되었다. 참고로 에어 조던 시리즈는 마이클 조던의 위대한 선수 생활이 스토리텔링으로 더해져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이후로도 나이키는 조던 브랜드를 독자적으로 런칭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에어 조던의 성공으로 큰 매출을 올린 나이키는 이후에도 타이거 우즈, 로저 페더러, 호나우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코비 브라이언트, 르브론 제임스 등 각 분야의 스타들과 계약을 맺어 각각의 라인을 런칭하고 스토리텔링을 불어넣는 마케팅 방법을 고수하게 된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나이키는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전세계에 자신들의 생산라인을 확장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는 생산지의 노동자들이 아동이고 급여를 거의 못 받은 채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키는 초창기 계약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기 꺼려했지만, 결국 나중에는 정보를 보고서로 제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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