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승 OZ의 에이스. 온게임넷 스타리그 저그 4대(EVER 2007), 6대(바투), 7대(박카스 2009) 우승자이자 2번째 리버스 스윕, 2번째 프로리그 100승, 임요환, 허영무와 더불어 스타리그를 2번째로 2회 연속 우승한 선수. 저그의 2번째 골든 마우스 등등 2라는 숫자와 인연이 있다. 잘 다루는 유닛은 저글링과 뮤탈리스크로, 타 선수를 압도하는 센스와 컨트롤 덕에 그의 시합은 보통 레어 테크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때는 레어 본좌라고 불리우며 레어 단계에서의 몰아치기로 상대를 뭉개버리는 플레이를 자주 선보여 별명이 폭군, 파괴신 등이다. 2010년을 기준으로 폭군이라는 명칭이 거의 정식 별명이 되었다.
울산 출생으로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DDR, 철권, 세이브축구, 1945등 안해본 게임이 없을정도로 오락실 매니아였던 이제동 어린이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은 초등학교 4학년때 부모님이 사주신 컴퓨터이다. 친형의 친구인 인욱이형이 알려준 스타크래프트를 접하고 부터 "와, 뭐 이런 게임이 다 있어!" 라며 스타크래프트에 미친듯이 빠져들었다. 그때부터 공부는 추락을 거듭했다고 한다. 여타 프로게이머들과 비슷하게 처음에는 부모님의 반대가 극심했고, 프로게이머가 되기까지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한다.
중학생때부턴 울산시내의 PC방 대회를 자주 나갔는데, 하도 부모님이 반대하시니 몰래몰래 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 클라스가 남다르다 점점 실력과 우승횟수가 늘자 울산에는 더 이상 자기를 이길 사람이 없다고 판단한 중학생 꼬맹이가 부산과 서울의 대회까지 출전할 정도였다. 어찌 우물안 개구리로 남아있으리오 자기도 무모했다고 말할 만큼 중학생 꼬맹이에겐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때부터 떡잎이 보였다. 평범히 게임을 즐기는게 아니라, 진지하게 이 길을 걷겠다고 다짐한것도 이때쯤이다. 점점 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자 프로게이머가 되겠다는 욕심도 늘었고, 결국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끝내 설득해서 공부와 병행하면서 게임을 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실제로 그걸 지켰다. 주중에는 공부를 하고, 주말에는 지방대회를 나갈 차비를 타서 대회에 참가하는 식이었다.
이때의 일화로,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난생처음 야간버스를 타고 서울 강남터미널에 도착했는데, 혼자라서 무섭고 막막했다고 한다. 지하철도 처음타고, 삼성역 코엑스에 도착하니까 문이 닫혀있어서 문이 열릴 때까지 의자에서 노숙을 했다고한다. 그때 3등을 했다고 하는데, 응원해주는 사람도, 지지해주는 사람도 없는데다가 어린나이에 버스타고 게임 대회를 나가서 남들이 인정해주지도 않는 게임을 위해 이러고있나 싶어서 허전하고 서글픈 심경뿐이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부모님이 직접 데려다주신 포항의 한 대회에서는 1등으로 디지털 카메라를 받았다. 부모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1등을 해서 정말 뿌듯했다고 한다. 이벤트 대회에는 마침 한창 게임으로 유명한 사람들은 거의 다 만났다. KOR팀의 전태규, 주진철 선수를 만나고 가슴이 설렜다고 한다.
그렇게 막연하게 프로게이머의 꿈을 꾸던 꼬맹이는 입시라는 거대한 암초를 만나게 된다. 당연히 미친듯이 게임을 했으니 중학교 성적은 바닥이었고, 꼴지에 가까운 성적에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게될 상황에 빠졌다. 부모님이 내건 조건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게임을 계속 하도록 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저그스럽게 미친듯이 공부를 해서 2005년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하는데에 성공했다. 당연히 게임에 미쳐있으니 수업도 눈에 들어올리가 없었고, 밤에는 게임을 하고 낮에는 잠으로 보내며, 야자를 빼주지 않으니 학교를 무단조퇴하고 야자를 빼먹고 게임하러 가기 일쑤였다. 그때 당시의 프로게이머에 대한 인식은 막장 of 막장이라 선생님도 반대가 심했고, 상처가 되는 말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한창 예민할 사춘기에 반항심이 드는건 당연지사이다. 결국 1학년 2학기, 자퇴를 결심한다. 공부가 싫은 것이 아니라, 그냥 게임에 미쳐있고, 프로게이머가 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때의 생활은 매우 단조로워서 일어나서 연습-밥-연습-밥의 반복이었다. 자기가 좋아해서 선택한 일이지만, 미래가 불확실하니 불안함도 많았고, 부모님께 죄송스럽고 죄짓는 느낌이 많이 들어 더욱더 열심히 연습하고 커리지에 참가하고 계속 도전했다고 한다. 이때의 이제동을 잡아준 것은 바로 친구들. 어른들은 전부 반대해도 친구들은 자기를 응원하고 힘을 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자퇴하고 아마추어로 연습만 하던 그 다음해, 온라인에서 플러스(르까프 OZ의 전신) 팀의 조정웅 감독을 만나게 된다. 이때는 계속 커리지에 도전했지만 아홉 차례나 커리지에서 떨어질 정도로 막막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도중에 이제동에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는데, 조정웅 감독이 전화로 먼저 팀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의를 한 것이다. 덕분에 이제동은 플러스 팀의 온라인 연습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열 번째 커리지가 2주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신림동에 있는 숙소에서 연습하라며 선뜻 이제동을 서울로 불렀고 밥도하고 설거지도 하고 선배 형들 빨래도 하면서 자퇴한지 몇 달 만에 커리지를 뚫게된다. 이때가 2006년 1월이다. 이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고, 조정웅 감독도 "너는 무조건 될 줄 알았어!" 라며 축하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2006년 3월부터 프로생활을 시작한다.
조정웅 감독은 이런 이제동을 기특해하며 다른 팀원들보다 더 관심을 갖고 훈련시키며 집중관리에 들어갔다. 이제동 본인도 '프로게이머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조정웅 감독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힐 정도로 조정웅 감독은 이제동에게 있어는 은인인 셈이다. 이제동도 조정웅 감독에게 많이 의지하고, 많이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숙소생활은 '군대같았다'며 규율도 선후배관계도 엄격했다고 한다. 다행히 본인이 그런 것에 별로 개의치않았고 게임에만 미친 사람이라 별 불편한 점은 없었던 듯 하다.
이후 2007년 서울 국제 e스포츠 페스티벌 우승 (VS허영무 2:1), 2007년 WCG 2007 한국 예선 16강, 2007년 EVER 스타리그 2007 우승(VS송병구, 3:1) 자퇴한지 2년만에 스타리그 우승, 그것도 양대리그 로열로더라는 대업을 이룬다. 조정웅 감독이 평하길, 실력이전에 인성이 완성되어있는 선수이다. 온라인 연습생으로 그냥 발탁한게 아니라 눈여겨 보고있다가 성실한 자세와 인성, 게임에 임하는 진지한 자세가 조정웅 감독의 마음을 움직였고, 이 친구라면 반드시 성공할거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한다. 이제동은 노력을 가장 많이 하는 선수, 가장 열심히 하는 선수였다고 칭찬한다. 무섭도록 게임 하나에만 집중하고 게임 이외에는 유혹을 차단하는 등 자기관리도 철저했다고 한다. 첫 우승 이후에도 부던하게 노력하고 성과를 계속 낼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바른 인성과 조정웅 감독의 '집중관리 전기의자'가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평dl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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